사건들에 엄청난 트릭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트릭이 너무 없는 편.
사건들이 자체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모두에게 알리바이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불가능해보이지만 이러이러하면 범행이 가능했고 그게 가능한 사람은 이사람뿐이었다, 그래서 이사람이 범인이다 하는 식으로 범인을 추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냥 모든 사건들이 모두에게 가능한 상황..
게다가 범행 계획 자체가 치밀함과는 거리가 먼 허술한 계획이었다. 오르치를 처음으로 죽인다는 것만 계획이었고, 그 뒤에 커피는 아무나 죽어라 하고 꾸민거에 카가 걸려서 죽은것이고, 애거서 립스틱에 독을 바른것도 언젠가는 죽겠지하는 계획이었다. 루르는 우발적이었고, 숫자가 적어지면 격투로 제압해서 죽일 생각까지 하고 나이프를 들고 있다가.. 운이 좋아서 포를 즉흥적으로 죽이고, 앨러리도 죽일 찬스를 잡게 된것. 프롤로그에 계획은 엉성하다고도 언급되어있다.
그나마 마지막 두명이 남았을때 나는 앨러리를 범인으로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면 50프로 찍기를 틀린 셈이다..) 그 이유는, 범인이 내부에 있다고 생각하는 상황이었다면, 3명이 남은 상황에서 한명이 쓰러지면 남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범인이라는 것을 확정하고 바로 그 사람을 공격하게 될것이기 때문이다. 3명중 한명이 쓰러져서 둘이 남는 순간 격투를 피할수 없는게 정상인데, 이것을 피할 유일한 방법이 범인이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고, 그 역할을 앨러리가 했기 때문이다. 나는 앨러리가 포를 죽이고 그 때 밴이 자신을 바로 공격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범인 외부설을 미리 주장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범인 외부설의 근거인 지하 통로를 처음 발견한것도 앨러리고..
그런데 너무 허무하게, 이것은 그냥 앨러리의 순수 삽질이었다는게 진상이었다. 밴은 그냥 공격들어오면 진짜 격투로 제압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앨러리가 그때 범인 외부설이라는 삽질을 해주는 바람에 더 안전하게 죽일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었고..
사실 이 진상이 너무 허망해서, 밴 입장에서의 진상을 읽는 동안에도 또한번의 반전이 있지는 않을까 하고 계속 기대했다.. 사실 앨러리는 3명 남았을 무렵에 밴이 범인이라는 것을 파악했다. 그런데 2명이 남게 되면 자연스럽게 밴이 자기를 직접 죽이려 들텐데, 자기는 다리를 다쳐서 격투에서 이길 방법이 없다. 그래서 일부러 범인 외부설을 주장해서, 자기는 범인 외부설을 지지하는 입장이라서 둘만 남더라도 밴을 범인으로 의심하지 않을 거고 그러니까 너도 나를 당장 공격할 필요가 없다라는 상황을 깔아두고, 기회가 될때 역습을 하거나 뭔가를 꾸미려고 한것이다.. 그래서 밴이 빠져나가고 십각관이 불타고 앨러리의 불탄 시체가 발견되었지만, 불탄 시체=바꿔치기 가능 이라는 공식에 따라서, 앨러리는 사실 살아있었고 (바뀐 시체는 어떻게든 만들었다 치고) 그래서 밴한테 복수를 한다..라는 반전 결말을 기대했는데. 그런거는 없었다
암튼 추리 자체는 너무 허술. 추리할 건덕지가 없는것도 그렇고, 십각관 건물 구조에 대해서 뭔가 선이 이상하다 어떻다는 묘사가 계속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트릭으로 쓰이지 않았다. 십각관 안에 비밀통로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긴 했지만 범행에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으니 없는거나 별 차이 없고. 그리고 추리소설의 '범행 순서를 의미하는 범인의 신호가 있음 = 실제 범행 순서는 달랐음' 공식도 여기에서는 적용되지 않았다. 진짜로 죽은 순서대로 피해자 팻말이 붙게 되었다.
당연히 르블랑이라고 생각했던 모리스의 닉네임이 밴다인이었고, 밴이 육지와 섬을 오가며 활동했었다는 반전은 확실히 충격적이기는 했다. 서술트릭에 가까운 농락. 하지만, 클로즈드 서클에서 밖으로 왕래가 가능하다면 그걸 클로즈드 서클이라고 부르는게 맞긴 한건지, 상황 자체가 사실상 반칙 아닌가 하는 느낌도 있다
밴은 사실 처음부터 가장 수상한 캐릭터긴 했다. 피해자들이 섬으로 모이게 된것 자체가 밴이 부른것이었으므로, 여기서 일단 수상함 포인트를 먹고 시작한다. 밴을 조금 의심에서 내려놓았던 것은, 애거서의 시체가 발견되던 날 아침의 각자의 입장에서의 묘사가 있는데, 밴은 이때 아가사의 시체를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은것으로 묘사된다. 이것은 사실 밴이 애거서를 살해했다면 나오기 힘든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앨러리나 포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범인이었어도 쓸수 있다고 생각했다. 범행 저지르고 진짜로 잠들었다가 다시 깼을수도 있으니까. 뭐.. 진상은 애거서를 죽인 방법은 립스틱 시한폭탄이었기 때문에, 마침 그날 죽으리라고는 예상을 못하고 있었고, 그래서 진짜로 충격을 받았던것이 맞았다. 아무튼, 여기에서 수상함 포인트를 많이 깎았고, 그 뒤로는 앨러리가 수상함 포인트를 너무 많이 벌어서 앨러리로 착각할수밖에 없었다 ㅜ